개념들은 설사 그것들의 역사가 다를지라도, 서로 연결되고, 다시 분할되고, 개념의 윤곽을 함께 만들고, 문제를 구성해가면서, 비로소 하나의 동일한 철학에 속하게 된다.
질 들뢰즈
철학은 아르케를 바탕으로 흩어진 전문지식을 연결하는 관계망,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최근 본 철학 관련 글에서 본 철학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적어도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면 동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과 수업에서는 다양한 분과 철학들도 다룬다. 생명윤리, 정치, 성평등 등 언뜻 보면 사회학과와 정치학과에서 다룰 법한 것들이다. 철학과의 분과 수업에서는 주장에 대한 자신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근거가 또 어떠한 철학적 세계관에서 근거한 것인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사 토론에서처럼 근거만을 제시한다면, 그 근거가 얼마나 잘 써졌든 낮은 점수를 얻게 된다. 다른 학문의 강의를 들었을 때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평가 방식이다. 사실 그 방식은 철학의 정의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갑자기 철학의 정의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게 된 까닭은 내가 4년간 철학을 배우고, 철학 공동체에서 학습하며 과연 어떤 것을 위해 공부했나 정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플라톤 그리고 그 이래로 탄생한 수많은 철학자들과 같이 나 또한 아르케를 찾고자 철학을 시작했고, 때로는 특정 세계관이나 사상을 보고 그것을 찾았다고 믿는 때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믿음은 몇 달 정도가 지나는 족족 깨졌다. 정말 값진 경험들은 아르케라고 믿었던 것들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났다. 교육 과정, 사회로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된 옳고 그름에 대해 메타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고자 한 여러 철학 사조들을 통시적으로 공부해 나가면서-이 점에서 철학은 역사와 뗄 수 없는 짝꿍이라는 것은 분명하다-인간이 짧은 역사 속에서 구축한 세계관들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대한 에고는 점차 옅어지고,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사고의 한계도 어쩔 수 없이 규정되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역설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짓지 않고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를 키워나간 것 같다. 철학이라는 학문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메타적인 사고, 그리고 그 철학에 대한 메타적 개념이 내가 한 명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어갈 수 있도록 길러 준 것이다. 윤리학은 철학의 작은 부분일 뿐이나, 철학의 성질 자체가 인간에게 윤리를 깨우쳐주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그래서 나의 밥벌이는 나에게 옅지만 지속적인 기쁨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개발은 코드 전체의 구조에 대한 메타적인 조망과 추상화의 추상화를 거듭하는 설계에 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심지어 그에 대한 방법론을 다룬 책들도 잔뜩이다. 작은 세계를 구축하는 일의 연속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창조적 행위라기 보다는(예술 등), 추상적 구조를 설계하고 그 안의 인과관계를 설계하고 리팩토링하는 것에 있어서 철학함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느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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